(1세~10세)
동리는 어머니가 42세 때 얻은 막내였다.
먹을 젖이 부족했던 아이는 아버지가 드시고 난 술대접에 손을 대기 시 작했다.
그것이 3세 때부터 술을 마시게 된 동기였다.
6세 때는 「내가 달라면 주고 때리면 맞아주었던」소꿉친구인 선이를 잃은 충격으로, 평생 죽음이란 명제를 화두로 삼게 되었다.
우울하고 병약했던 소년 동리는 계절마다 이유없이 앓아누웠고, 혼자서 산과 들을 배회했다. 그에게 외로운 「혼자」는 무서우면서도 오히려 본 향으로서의 자연과 합일하는 의식이었다
문학의 바다로향해
(10세~20세)
동리에게 책은 제도교육을 몇 단계 뛰어 넘는, 그의 정신 연령을 충족시켜 주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맏형이신 한학자 범부선생의 서가에 꽂힌 책들을 읽으며, 지식욕을 채워가던 그는 스스로 학업을 놓았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으로 의학공부를 하라는 중형의 권유를 거절함으로써 그의 진로는 온전히 책들의 바다로 향하게 되었다.
철도원에 근무하는 친척형의 도움을 받아 도서관 장서들을 한권 한권 독파할 때마다 그는 「무엇을 읽든 나는 자신이 쓴 것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한편 이 무렵, 그의 중형은 사범학교 수재들과 함께 가게 뒷방에서 헤겔 전집을 가지고 사상공부를 하고 있었다. 「돗대 없는 백의민족」이란 항일시를 기특하게 여긴 그들은 동리를 불러 사상을 주입하려고 시도했다. 동리는 즉각 그 사상의 기만성을 알아차렸다. 「내 것이 없는 세상은 살 의미가 없다」나중에 그 아지트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면서 그들은 옷과 헤겔 전집을 동리에게 물려주며 유언을 남겼다. 동리는 그것들을 항아리에 넣고 묻어 버렸다.
시 소설로 등단
(20세~30세)
20대 초반의 어느 날, 동리는 다솔사에서 불경과 동양철학을 가르치던 범부로부터 만해가 왔으니, 절로 오라는 기별을 받았다.
그 당시 다솔사는 주지 최범술 스님을 중심으로 항일을 모의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동리는 만해, 김법린, 최범술 등에게 소개되었고, 이들의 영향권에서 민족의식을 다지는 한편, 불경을 깊이 공부했다.
그는 잠시 출가를 꿈꾸어 보았으나, 가부좌가 되지 않아 참선을 할 수 없었다.
일제가 다솔사 부설 광명학원을 폐쇄해버리자, 그곳에서 한글을 가르치던 동리는 소설 습작에 전념했다. 그 결실의 하나인 「화랑의 후예」가 『조선중앙일보』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산화』가 『동아일보』에 당선되었다.
좌익문학에 맞서
(30세~35세)
작가의 길로 들어선 동리는 작품을 통해 민족의식, 한국의 얼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 「화랑담(花郞譚)」에서 선(仙)의 이념을 개진한 범부의 영향으로, 화랑→산인(山人)→무당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이 밑그림이 동리 작품 세계의 신인간주의를 탄생시킨 사상적 기저가 되었다.
이 무렵 친일단체인 문인보국회와 국민문화연맹으로부터 가입통지서가 날아왔으나 불살라버렸고, 소설「소녀」와 「하현」이 일제의 검열에 걸려 전면 삭제되자 해방 때까지 절필하고 침묵했다.
(35세~40세)
해방 후 동리는 사천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좌익단체인 문학가동맹에 가입되어 있었다.
「나는 무척 쓸쓸했으나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동리는 문학을 구호화하는 것을 막고, 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서정주,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었다.
이 무렵 쓰여진 「혈거부족」,「황토기」,「지연기」등의 작품들은 정치색이 짙은 문학풍토에 저항하는 작가정신의 소산이었다.
그는 혼자서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좌익 논객들의 정(釘)을 신랄하고도 날카로운 필봉으로 막아냈다.
불후의 꽃을 피우다
(40세~50세)
동리가 「작가생활 35년 만에 작품다운 작품을 썼다」고 한 『사반의 십자가』는 1955년 『현대문학』에 연재된 후 195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사반의 십자가』는 현실적이며 지상적인 가치와 초월적이며 천상적인 가치의 대결을 주축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무녀도」에서도 서구 기독교와 한국의 토착샤머니즘의 대결을 통해 세계관적, 문화적 이념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작가 자신은 비평이나 실제의 행동에서 인간주의와 동양주의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소설에서는 어느 한편의 손쉬운 선택을 거부하고 그 두 가지의,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대립적 관점을 객관화하고 있다. 이 같은 작가적 진지성이 김동리 소설의 탁월함을 입증해 주는 예이다.’ -김병익
잡지를 창간하고
(50세~55세)
후학을 가르치는 명장으로서 김동리의 면모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가 가르친 6회 서라벌 예술대 졸업생 전원이 문단에 나왔다. 동리는 강의 첫날, 학생들에게 글을 쓰게 해 보고 그 사실을 예언했다.
서울대 국문과, 고려대 국문과 강사를 거쳐 중앙대 예술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강단에서 가르친 세월은 30년이었고, 감태준, 김민숙, 김원일, 김정례, 김주영, 김지연, 김형영, 노순자, 박상륭, 백시종, 송기원, 송상옥, 양문길(작고), 오정희, 유현종, 이경자, 이근배, 이동하, 이문구(작고), 이채형, 천승세, 한분순, 황충상 등 빼어난 문학활동을 하는 현역 작가들이 1백여 명에 이른다. 또한 그가 창간한 잡지만도 4종에 이르러 수많은 작품의 산실이 되고 있다.
(55세~60세)
「나는 단체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꾸 나에게 단체를 맡긴다」고 했듯이, 단체는 평생 그를 따라 다니며 무거운 짐을 안겨 주었고, 늘 선봉에서 사나운 바람을 맞게 했다.
그는 그 역할을 피하지 않았을 뿐, 한번도 즐겨서 한 일은 없었다.
시대에 대한 어른으로서의 책무는 그에게 수많은 상처를 남겼으나, 그 상처는 그가 비겁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33세 때 사천청년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청년문학가협회 회장, 한국문총 사무국장,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시 예술위원, 중앙대 예술대 학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일문화교류협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다.
명상세계로 돌아오다
(60세~83세)
대구 계성중학 2학년 때 백형이 안진경법첩을 주고 운필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 뒤 다솔사에 묵고 있을 때 서예가 하동주 선생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동리의 서예삼매는 58세 이후 쭉 이어져 틈이 나는 대로 붓을 잡았다. 집안에는 항시 묵향이 감돌았다.
「문장을 쓸 때는 고통스러운데, 글씨를 쓰는 것은 즐겁다」73년 회갑기념 서예전 때 오체를 두루 쓴 55점을 선보여 서예계의 주목을 받았고, 검여(劍如), 동정(東庭), 일중(一中)등과 친교를 맺는 한편, 한ㆍ중ㆍ일 서예문화교류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류전을 주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