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이다. 그는 1915년 1월 6일, 경상북도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번지에서 아버지 박준필과 어머니 박인재 사이의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준필은 당시 경주군 수리조합(지금의 토지개량조합)의 이사였고, 대구로 나가 중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유지였다. 어머니 박인재는 목월이 보통학교 4학년 되던 해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신앙은 이후 목월의 정서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목월의 할아버지인 박훈식은 개화의식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개화의식은 목월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경주에서의 유년

1923년 4월 박목월은 경주군 서면 건천리에 있는 건천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모량과 건천은 십 리가 넘는 길이었는데, 목월은 모량과 건천사이의 들길을 오가며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목월이 보통학교 4학년 되던 해 봄, 아버지 박준필은 분가를 해서 집을 건천으로 옮긴다. 이는 조부 박훈식이 아들의 출퇴근과 손주의 통학편의를 고려해서 권고한 것이었다. 목월의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대구 수학시절(동시세계)

1930년 4월 목월은 대구에 있는 미션계 중학인 계성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3학년 때인 1932년부터 서울에서 발간되는 아동잡지 『아이생활』에 동요를 투고하기 시작한다.
목월의 동요가 기성 동요시인의 대접을 받고 처음으로 발표된 것은 1933년 봄 개벽사 발행의 『어린이』라는 잡지에 「통딱딱 통짝짝」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6월, 동요 「제비맞이」가 여성잡지『신가정』의 현상공모에 당선되어 발표되었다. 이 무렵 목월은 평생을 문학에 걸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취업과 문인과의 교유

1935년 3월 박목월은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경주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한다.
1935년 9월 목월은 『아이생활』에 동시 「소롱소롱 이슬이」를 발표한다.
그러나 동시만으로는 문학적 갈증을 해결하지 못해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성인시를 쓰게 되어 1935년 1월호와 3월호『학등』에 발표된 「달은 마술사」와 「송년송」 그리고 1936년「옛날과 가랑비」를 발표하였다. 이후 목월은 1939년 9월 『문장』에 「길처럼」과 「그것은 연륜이다」를 발표하여 첫 추천을 받는다. 같은 해 12월 「산그늘」이란 시로 두 번째 추천을 받고, 1940년 9월 「가을 어스름」과 「연륜」으로 세 번째 추천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달 『문장』에서 「여백」이란 제목으로 추천완료 소감을 발표한다.

 
해방과 「청록집」발간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박목월은 『문장』폐간 이후 묻어 두었던 노트와 작품들을 꺼내 다시 손질한다. 1946년에는 김동리의 권유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면서 박두진, 조지훈 등을 알게 되어 같은 해 6월6일 『청록집』을 발간하게 된다.
『청록집』은 기성 시인의 것으로는 해방 후 처음 나온 창작집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목월은 공군종군문인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투리」라는 시를 쓰게 되는데, 목월은 이 작품으로 청록 계열의 초기 시를 벗어나 중기의 세계에 들어선다.

 
대학 강의와 「산도화」「난·기타」발간

박목월은 1955년 12월 처녀 시집 『산도화』를 발간한다. 그러나 수록된 작품들은 거의 『청록집』의 작품들과 같은 시기에 쓴 것들이었다. 『산도화』출판에 앞서 목월은 그 해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받는다. 『청록집』계열의 작품이 아니라 피난생활 중 전환을 보인 새로운 작품들이 이 상을 받게 한 것이다.

목월은 1956년부터 1959년 사이에 수상집『구름의 서정』(1956)『토요일의 밤하늘』(1958)『여인의 서』(1959)와 자작시 해설『보랏빛 소묘』(1958)『문학강화』 등을 잇달아 발간한다. 이후 시작업은 더욱 활발해져 1959년에는 두 번째 개인 시집『난ㆍ기타』를 발간한다

 
한양대학교 재직과 시집
「청담」
「경상도의 가랑잎」
「무순」발간

1962년 3월 한양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조교수로 임용된 박목월은 강의와 더불어 작품을 쓰고 책을 내는 일에 몰두한다. 시집『청담』(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어머니』(연작시집, 1968) 『청록집ㆍ기타』(조지훈, 박두진과 공저, 1968) 『산새알 물새알』(동시집, 1962)이 이 시기동안 나온 것들이다.

산문집으로는 『동시의 세계』(1963) 『밤에 쓴 인생론』(1968) 『구름에 달 가듯이』(1968) 『불꺼진 창에도』(1969) 『사랑의 발견』(1970) 『뜨거운 점 하나』(1970)등이 있다. 목월의 마지막 시집『무순』은 1976년에 발간되었으며, 이 해 그는 한양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취임한다.

 
한국시의 중흥을 위한 노력,
한국시인협회 세미나, 전문시집「심상」창간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한국시의 중흥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시인협회 세미나’와 전문시지『심상』의 창간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시인협회 세미나는 전국에 흩어져 작품 활동을 하는 시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교를 돈독히 하고, 숙식을 함께하며 한국시의 제반 문제를 논의하는 중요한 시단 행사로, 박목월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현재까지 매년 개최되고 있다.
전문시지『심상』은 ‘권위있는 교양 시지’를 표방한 본격적인 시 잡지로 박목월이 필생의 과업으로 추진함으로써, 시 이론과 시의 필진을 새롭게 개발하고, 동서양의 시론을 균형있게 다루는 등 한국 시 잡지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 올렸다.

 
유고신앙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발간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에서 돌아온 박목월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누웠다가 지극히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장례는 한양대학교에서 치러졌으며, 한국시인협회ㆍ한양대학교 문리대 공동장이었다.
가족과 후배들은 그의 육신을 용인 모란공원에 묻었다. 다음해인 1979년 1월 미망인 유익순과 장남 박동규는 그가 평생 동안 쓴 신앙시 중에서 고른 시편들로 유고신앙시집『크고 부드러운 손』을 발간하는데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종교적 제재와의 교감을 통해 투영해 낸 목월의 시 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아버님은 시에 대한 태도가 매우 엄격한 분이었어요. 특히 자기 시를 대하는 태도가 그랬지요. 아버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나는 시에 관한 비평을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처럼 엄격한 태도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장남 박동규의 회고 부분.